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바오로 2세 (문단 편집) === 정통 교리 수호 === 온건하고 유화, 화합적인 교황이기는 했지만 [[콘돔]]의 사용이나 여성 [[사제]] 반대 등 교리적 측면에서 [[가톨릭]] 정통 교리를 고수했다. [[바오로 6세]] 등 선대 교황들에 이어 자연 순리를 따르지 않는 '''인공적인''' [[피임]]을 엄격하게 거부하였다. [[혼인성사]]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급진적 [[해방신학]]의 활동을 막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적극적 반대에 나섰다. 해방신학의 경우 [[가톨릭]]의 교리를 생각하면, 특히 사회적 개혁에 찬성하는 교황(대표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들도 해방신학에 대해선 부정적인 것 등 생각해 볼만한 거리다. 평신도 영성 단체인 [[오푸스 데이]](Opus Dei, 하느님의 사업)와의 연계, 특히 친위대나 싸고 돈다는 식의 비판을 많이 받기도 했다. 실제로 교황 직속의 성직자치단이 된 것이 [[1982년]]이요,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몬시뇰]]을 [[성인(기독교)|시성]]한 것도 요한 바오로 2세 때인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47차례의 시복식을 주재하여 1,338명을 시복하고 51차례의 시성식을 주재하여 총 482명을 시성하였다. 또한 9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여 231명(1명의 비밀 추기경 제외)의 추기경을 임명하고 6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였다. 바오로 2세는 1978년부터 주교대의원회의를 15회 소집하였다. 여기에는 정기총회 6회(1980, 1983, 1987, 1990, 1994, 2001), 임시총회 1회(1985), 특별총회 8회(1980, 1991, 1994, 1995, 1997, 1998[2회], 1999)가 있다. 주요 문헌으로는 14개의 회칙, 15개의 교황 권고, 11개의 교황령과 45개의 교황 교서가 있다. 목자의 배려로 많은 교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라틴 가톨릭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를 위한 교회법전도 공표하였다. 하느님 백성을 격려하는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구원의 해, 마리아의 해, 성체성사의 해, 2000년 대희년 등을 제정하였다. 또한 세계청년대회를 제정하여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요제프 라칭거|아래 서명한 장관]]과의 만남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교리성 정기 회의에서 채택된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documents/rc_con_cfaith_doc_19831126_declaration-masonic_lt.html|'프리메이슨 단체들에 관한 선언']]을 인준했고 발표를 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